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일본 제국) (문단 편집) === 창설 초기 === 주차군 시절에는 본토 사단들이 교대로 파견을 오다가 조선군으로 정식 개편될 때는 19, 20 두 개의 상비사단이 설치되었다. 1910년 부터 상비사단 설치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당시 일본의 경제력상 큰 논란이 되었다가 1915년 12월에 사단 사령부 설치 후 1920년에 마지막 연대가 창설되어 배치 완료된다. 이후 1943년까지, 그러니까 일제강점기 내내 아래의 2개 사단 편제였다. * 제19사단(나남) - 73연대(나남), 74연대(함흥), 75연대(회령), 76연대(나남), 기병27연대(나남), 산포병25연대(나남) * [[제20사단#s-2]](용산) - 77연대(평양), 78연대(용산), 79연대(용산), 80연대(대구/대전), 기병28연대(용산), 야포병26연대(용산). 공병20연대(용산) 각 사단은 2개 보병여단 4개 보병연대의 4각 편제였다. 포병연대, 공병연대, 치중연대가 있었으며 평시 병력은 각 사단 1만 2천명이었다. 조선군이라고 하여 조선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19사단은 도후쿠, 20사단은 간사이, 규슈 지역에서 병력 충원하였다. 다만 조선이 망하면서 일본 육사로 넘어간 일본 육사 26기~27기 조선인 장교들이 있었다.[* 조선인 장교를 연대별 1명을 초과하여 둘 수 없다는 암묵적 룰이 있었다. 그럼 1개 사단에 조선인 최대 인원은 7명?] 그리고 19사단은 두만강 연안의 국경 경비를, 20사단은 북서부 압록강 유역과 남한지역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들 2개 사단은 1925년 4개 사단을 폐지하는 우가키 군축에도 살아 일본 육군을 대표하는 17개 사단의 일익을 담당한다.[* 일본은 이들 17개 사단만 상설 사단이라며 우대하여 주로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이후 찍어낸 백여 개의 사단들은 특설 사단이라 부르며 예비역들 중심의 2선 부대로 중국전선이나 태평양으로 가서 옥쇄한다. 전쟁 막판에는 관동군의 상설 사단은 본토결전을 대비하여 일본 등으로 빼내고, 관동군 역시 특설 사단으로 채워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